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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s Bible Truth Study/Trinity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올바른 접근: 성부와 성자는 완전히 같은 분

by 반데스 2020. 1. 13.

삼위일체 교리는 교파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채택하고 있는 교리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삼위일체는 아직까지 기독교의 난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 에서는 너무나 정확하게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한다.

왜 그럴까? 우선 삼위일체 교리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고, 왜 삼위일체 교리를 많은 교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상세히 알아보자.


Chapter 0.

삼위일체 교리: 하나님의 교회와 기성 교단의 차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삼위일체와 기성 교단에서 이야기하는 삼위일체의 개념이 왜 다를까? 우선 그 차이점에 대해 명확히 이해를 해야 진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확실해지지 않을까 싶다. 먼저 기성 교단에서 이야기하는 삼위일체에 대해 알아보자.

그들의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분명 한 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위격(person)으로 구분되며, 이 세 위격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세 분이 존재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또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 말을 하면서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이 개념을 조금이나마 쉽게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그림을 첨부해보았다.

이 그림은 '삼위일체 방패'라는 것인데, 아버지(PATER)와 아들(FILIUS)과 성령(SPIRITUS SANCTUS)은 한 하나님(DEUS)이지만 동일한 인격은 아니다(NON EST)라는 것이다. 뭔가 말이 되는 듯하면서도 말이 안 되는 것 같고, 그러면서도 묘하게 이해가 되는 것 같은 이 이상한 느낌. 만약 그 느낌을 느끼고 있다면 절대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다. 모두가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기에 삼위일체는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신학 속 '난제'로 자리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Chapter 1.

삼위일체에 대한 올바른 접근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당신은 지금 비빔국수를 먹으려 한다. 그렇다면 숟가락과 젓가락 중 어떤 식기를 사용해야 편할까? 당연히 젓가락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당신은 지금 호박죽을 먹으려 한다. 그렇다면 숟가락과 젓가락 중 어떤 식기를 사용해야 편할까? 당연히 숟가락일 것이다.

 

국수에는 젓가락, 호박죽엔 숟가락(사진출처: pixabay.com)

음식에 따라 걸맞는 도구가 다르듯 진리를 이해할 때 살펴야 할 성경도 다르다. 비빔국수를 먹을 때 숟가락을 쓰면 호박죽을 먹을 때 젓가락을 쓰면 당연히 어렵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려 하면서 신약성경만 살피고 있다면 당연히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어떤 성경을 봐야 할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짚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이 당신을 증거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당시의 성경이란? 바로 구약성경이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에 대해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려면 구약성경을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Chapter 2.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장차 이 땅에 직접 임하실 것이라 예언하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장 6절)

장차 태어날 한 아기가 있는데, 이 아기는 아들의 입장으로 임할 것이다. 그런데 이 아기, 이 아들은 사실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한다. 정리하자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의 입장으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기의 모습으로 임하시는 여호와를 알아볼 수 있는 증표는 무엇일까? 바로 '다윗의 위'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이사야 9장 7절)

이 예언대로 다윗의 위를 가지고 한 아기, 한 아들의 모습으로 오신 그 분은 누구실까?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저에게 주시리니 (누가복음 1장 31~32절)

아들의 입장으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분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다윗의 위를 가지고 오실 분은 여호와신데 실제 그 예언은 예수님께서 이루셨다. 결국 예수님의 본질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근본 한 분이심을 증거하는 내용은 이것 외에도 너무나 많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고 있다. 왜 그럴까? 실제로 성경에서 그렇게 묘사한 부분도 꽤 되기 때문이다.


Chapter 2-1.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태복음 16:16~17)
예수도 세례(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3:21~22)

이외에도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밝히신 장면은 수도 없이 많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신약성경만 살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면 그만일 텐데, 삼위일체는 왜 난제가 되었을까? 그것은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으로 기록한 구절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아래의 구절들을 보면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Chapter 2-2.

예수님의 근본은 여호와 하나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5~8)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로마서 9:5)

빌립보서와 로마서는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뿐 아니라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존경의 대상으로 삼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근본이 사실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여호와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신약성경 안에서도 이처럼 상충하는 구절이 생기니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도 바울도 나름의 근거를 바탕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위와 같은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여기서 하나님의 교회 삼위일체론의 핵심이 등장한다.

역시나 구약성경이, 예수님의 본질을 밝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예언하고 있을까?


Chapter 2-3.

구약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700여 년 전,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사야 40:3)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등장할 것이며, 그는 하나님께서 오실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한다. 성경에 웬만큼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예언이 '세례(침례) 요한'에 대한 예언임을 알 것이다. 실제로 모든 공관복음서는 침례 요한의 역할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증거했으며(마태복음 3:1~3, 마가복음 1:2~4. 누가복음 3:3~6), 침례 요한 본인도 이를 인정했다(요한복음 1:23).

침례 요한이 예수님께 침례를 드리다 - 프란체스코 트레비사니(Francesco Trevisani) 作 (출처: 위키미디어)

그런데 중요한 것은 침례 요한이 누구냐가 아니라, 그가 증거한 이의 근본이 누구냐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침례 요한이 증거한 구원자는 예수님이다(요한복음 1:29~34). 그런데 앞서 살펴본 예언에서, 침례 요한을 상징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누구의 길을 예비했는지 기억나는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여기까지 살펴봤으면 다들 감을 잡으실 것이다. 예수님의 근본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Chapter 2-4.

짝된 말씀을 통한 확증

성자 예수님과 성부 여호와 하나님이 근본 한 분이시라는 증거는 이것 외에도 많다. 이번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짝된 말씀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Chapter 2-4-1.

천지를 창조하신 성부와 성자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이사야 44:24)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다. 기독교인이라면 굳이 이 부분에 의문을 제기할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말씀이 참이라면 '다른 누군가'가 만물을 창조했다는 기록이 등장해서는 안 된다. 뭐 이리 당연한 이야기를 하나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까 싶은데, 이제 소개해드리는 구절을 보면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로새서 1:14~17)

'그 아들'이 누구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과 예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구분이 있다는 말씀일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도 어딘가에 있다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만물의 범주에 포함되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인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지으신 존재인가? 모순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수많은 모순을 한 방에 해결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같은 분이시면 된다. 다른 구절을 하나만 더 살펴보겠다.


Chapter 2-4-2.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성부와 성자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처음과 끝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어로 치환해서 설명하자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A to Z 이시다" 정도가 되겠다. 참고로 저 이미지 속 Rev는 Revelation(요한계시록)의 약어다. 여기서 이걸 왜 설명하느냐? 요한계시록 속 A to Z는 여호와 하나님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A to Z시며 처음과 나중이시고 시작과 끝이시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별개의 존재시라면 요한계시록은 같은 책 안에 서로 모순된 내용을 적어둔. 그야말로 엉터리인 책이 되고 만다. 아버지[聖父]와 아들[聖子]이 어찌어찌 끝은 같을 수 있겠으나 시작까지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혹 이 구절을 보고서 "저 말씀 속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증거가 있느냐?'고 반문할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분들을 위해 구절 하나를 더 준비했다.

만군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4:6)

이 구절만으로도 깔끔하게 의문이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작성하던 중 하나님의 말씀을 혼동한 나머지 모순된 내용을 남기고 만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보다 약 800여 년 앞서 동일한 기록을 남겼던 이사야 선지자와의 대조를 통해, 성경이 얼마나 정교하고 믿을 만한 책인지 확실히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큰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성경의 정교함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만큼, 성부 여호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한 분이심을 의심할 필요도 없다. 위격이 어떠하다느니 그 능력이 어떠하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이야기로 하나님께 향하는 길을 어렵게 만들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그 본질까지 완전히 같은 분이시다.


Chapter 2-5.

임마누엘 그리고 예수님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를 한 번쯤을 들어봤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교회 삼위일체 교리뿐 아니라 기성 교단에서도 참으로 많이 인용하는 구절을 하나 먼저 살펴보겠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이 정도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다. 또한 이 예언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시라는 것도 두말 할 필요 없이 잘 안다. 신약성경의 짝된 말씀을 보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1~23)

"아, 예수님이 탄생하셨고 임마누엘의 예언을 이루신 분이구나" 하고 넘어가버리면 이제 삼위일체가 무척 어려운 난제가 되어버린다. 예수님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고, '임마누엘'의 뜻은 앞서 살폈듯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예언을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여기까지 설명했다면 감이 좋으신 분들은 눈치를 챘을 것이다. 예수님의 본질은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오신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됨'을 의미한다. 정리하자면 예수님께서 곧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 (출처: pixabay.com)


Chapter 2-6.

이삭과 예수님

아브라함 가정의 역사를 통해서도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근본에 대해 이해해볼 수 있다. 과거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사 둘과 함께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셨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극진히 영접하고 좋은 식사를 만들어 모셨다. 사람 되어 오신 하나님을 영접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축복을 베풀어주셨다. 그런데 이때 하신 말씀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세기 18:10)

그냥 아들을 낳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 지점에서 순간적으로 어떤 추론을 하신 분들이 '이게 그 의미가 맞아?'라고 긴가민가하실 수 있는데, 방금 머릿속을 스쳐간 그 의미가 맞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으로 탄생하시겠다는 뜻이다.

다만 한 가지 착각하면 안 되는 게, 하나님께서 이삭으로 탄생하신 것은 맞지만 그렇다 해서 이삭이 구원자나 그리스도는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아들의 입장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표상한 그림자의 역사일 뿐이다. 실제로 이삭과 예수님의 행보는 유사한 점이 많다.

첫째,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독생자의 입장으로 오셔서 희생 제물이 되셨다(창세기 22:9~10, 요한복음 3:16 비교). 둘째, 이삭 대신 숫양이 제물로 바쳐진 것은 제물의 실체인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짐승을 통해 제사가 이루어질 것을 표상한다(창세기 22:12~13). 셋째,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은 훗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전 터가 되었다(창세기 22:2, 역대하 3:1 비교). 이러한 이치를 정확하게 이해했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로 보내는 서신에 이러한 메시지를 담았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라디아서 3:16)

Chapter 3.

삼위일체 포스트, 첫 번째 마무리

이제 하나님의 교회 삼위일체 교리 중 성부와 성자에 대한 개념을 마무리하려 한다. 네 편의 포스트를 통해 성부 성자께서 근본부터 같은 분이며 완전히 동일·동질이심을 확인해봤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성부와 성자의 근본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지 못하면 삼위일체 교리 이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이 개념만 올바로 자리잡는다면 성부와 성령의 관계, 그리고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다음 포스트에서는 성부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